송강 정철이 김윤제에게 보낸 편지
460 여년 전 형조정랑 정철이 쓴 163자의 글
처외조부 환벽당 김윤제를 할아버지라고 불러
| 2023. 12.21(목) 16: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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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면앙정 송순과 제봉 고경명의 문집에 이른바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한 골짜기에 세 명승지를 일컫는 말로, 현재 담양군 ‘가사문학관’ 주변에 위치한 소쇄원(瀟灑園)·식영정(息影亭)·환벽당(環碧堂)을 가리킨다. 이중에서 환벽당은 광주호 상류 창계(蒼溪)가의 충효동 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나주목사, 성주목사 등을 지낸 사촌 김윤제(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한 곳이다. 당시에 이 환벽당은 돌을 쌓은 축대 위에 건립되었으므로 ‘환벽대’라고도 불렸고, 정자 형태를 띠고 있어서 ‘환벽정’이라고도 불렸다. ‘환벽(環碧)’이라는 말은 정자 주위에 푸른 산과 푸른 물이 고리처럼 둘러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윤제와 환벽당을 중얼거리다보면 한 명의 선비가 연상된다. 바로 송강 정철(1536~1593)이다. 그리고 환벽당 앞의 깊은 못인 영추(靈湫) 또는 용소(龍沼)의 일화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어느 날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영추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이상히 여겨 급히 그곳으로 내려가 보니 멱을 감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되어 외손녀를 이 소년과 혼인시켰는데, 이 소년이 나중에 정치가로서 또한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린 송강 정철이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영추의 일화는 예전부터 문자로 기록되어온 것이 아니라, 근래에 모 대학 교수가 일동삼승을 탐문하다가 인근 지실마을의 정씨 노인들에게 들은 내용을 녹취한 것이다. 일화의 신빙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정철이 김윤제의 외손녀 문화유씨(文化柳氏, 석헌 유옥의 손녀)와 1552년에 혼인하여 4남 3녀를 낳은 것은 확실하다.
이처럼 혼인관계로 인해 정철은 김윤제에게 외손주사위(外孫壻), 그리고 김윤제는 정철에게 처외조부(妻外祖父)가 되었다. 당시 재산이 넉넉했던 김윤제가 정철을 환벽당으로 불러 학업에 정진하도록 후원하고, 일동삼승을 자주 찾아 많은 시를 남긴 하서 김인후를 스승으로 모시도록 소개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정철은 김윤제의 따뜻한 후원에 부응하여 1561년 진사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별시에 당당히 장원급제하였으며 훗날 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를 거쳐 좌의정까지 승진하였다.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야했던 정철에게 김윤제는 어떤 존재였을까? 정철은 평소에 김윤제를 어떻게 불렀을까? 충효리에서 살았던 김충호씨(현재 훈몽재 산장)는 정철이 김윤제를 평소에 ‘외할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는데 이 얘기를 문중어른들에게 들었다고 하였다. ‘처(妻)’자를 빼고 자신의 외조부처럼 부름으로서 고마움과 다정함을 함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필자가 근자에 발견하여 처음으로 소개하는 정철의 편지는 이를 뛰어넘어 정철과 김윤제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는지를 가늠케 해준다.
이 편지는 병인년(1566년, 명종21) 정월 18일에 형조정랑이던 정철이 성주목사 김윤제에게 올린 답장이다. 김윤제는 1564년 5월 초에 성주목사로 부임하여 이 무렵에도 목사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김윤제는 목사로 부임하자마자 을사사화로 박해를 받아 성주에 유배된 묵재 이문건(1494~1567, 정암 조광조의 제자)을 찾아가 담화를 나누고 쌀과 콩을 보내 주었다. 그 외에도 성황사(城隍祠)를 불살라버리고 임풍루(臨風樓)를 중건하는 등 선정을 베풀고 있었다. 당시에 정철은 나이가 31세, 김윤제는 66세. 정철은 35세나 웃어른인 김윤제에게 행서와 해서체로 단아하게 직접 써서 사연을 전달하였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성주목사 동헌으로
할아버지[祖主]께 답장을 올립니다.
배석(培石) 편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평안히 거처하심을 알게 되니 무척 기뻤습니다. 저는 …… 이달 초에 전하의 은총을 입어 형조정랑(刑曹正)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소송문서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몹시 딱한 신세입니다. 저희 집 혼사(婚事)에 대해 말씀해 주셨지요. 그 집안에 아들이 있어 선조의 교훈을 실추시키지 않는다고 하시니, 족히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하여 굳이 가부(可否)를 여러모로 물어볼 필요가 없겠습니다. 다만 저는 그 사람 됨됨이가 더불어 선(善)을 추구할 만한지 직접 판단한 뒤에 정혼(定婚)해야 한다고 평소에 고집해 왔습니다. 그러니 우선 결정하시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딸아이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습성(習性)이 아직 교화되지 못하였으니, 천천히 6, 7년을 기다렸다가 혼사를 논의해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
병인년(1566) 정월 18일에 손식(孫息) 정철(鄭澈).
이 편지에서 정철은 김윤제를 아예 할아버지[祖主]라 쓰고 자신을 손식(孫息)이라 썼다. 손식은 손자(孫子)와 같은 표현이다. 이 얼마나 친밀하고 다정한가! 이때 정철의 슬하에는 12세 된 큰딸과 9세 된 큰아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김윤제는 겨우 12세 된 외증손녀의 혼사를 주선하기 위해 신랑 될 사람의 가문과 품성까지 적어 보낸 모양이다. 정철은 적잖이 당황하면서 신랑은 자신이 직접 살펴서 고르고 싶고 또 딸아이의 나이가 어리니 6, 7년 정도 더 가르쳐서 보내고 싶다고 결정을 미루었다. 어린 딸을 시집보내기 위한 부모의 세심한 마음이 읽혀진다.
정철의 답장을 받은 김윤제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김윤제가 소개한 신랑은 누구일까? 정철의 족보와 행장에 실린 그 첫째 사위가 혼담의 주인공일까? 모든 물음에 정확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현재 이 편지 외에 답할만한 기록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족보와 행장에는 정철의 첫째 사위가 효자 이기직(李基稷, 1556∼1578)으로 적혀 있다. 이기직은 정철의 큰딸보다 한 살이 작은데, 사헌부 장령을 지낸 이언침의 손자이며, 김인후의 제자로 학술과 행실이 뛰어나 소격서 참봉에 임명된 이지남(李至男)의 맏아들이다. 정철과 이지남이 김인후 문하의 동문이므로 이기직은 동문 친구의 아들인 셈이다. 김윤제가 소개한 신랑감이 이지남의 아들이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약 460여 년 전에 정철이 163자(피봉 포함)로 쓴 이 짧은 편지는 현재 《송강집》에 실려 있지 않지만, 환벽당 김윤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정보를 주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김윤제가 받은 유일한 편지이기도 하다. 세월이 오래된 만큼 편지 곳곳에 좀먹은 흔적들이 역력하지만, 정철과 김윤제의 마음을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러한 편지들이 많이 발견되어 옛 시대에 우리 선조들의 생활 모습과 인적 네트워크가 좀 더 선명히 밝혀졌으면 한다.
안동교<한국학 호남진흥원 자료교육부장>
박원지 기자 mhtong@hanmail.net 박원지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