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웅 :문화적인 갈등으로 피어난 ‘흔적’
| 2011. 09.30(금) 10:52 |   |
강태웅은 미국유학을 시작으로 10년 가까이 이국생활을 하고 있다. 단순한 일상생활을 뛰어넘는 치열한 창작활동을 전제로 하는 삶이다.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다시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한다는 것은 새로운 교육환경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공기(문화)를 흡입하려는 욕구의 소산이다. 유학생활이 일상생활로 이어지면서 창작활동의 본거지는 미국이 되었다. 이처럼 일상생활 및 창작생활의 기반이 미국으로 완전히 바뀜으로써 새로운 과제와 직면하게 됐다. 다시 말해 한국인으로서 미국시민이 됨으로써 토박이 미국인과는 다른 문화적인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것이다. 더구나 예술가인 그의 입장은 좀 더 세심한 감각으로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이국적인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국문화에 동화되지 않는 미국생활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몸에 익힌 정서 및 사고 그리고 정체성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두 가지 형태의 문화와 동거하는 것은 그에게 필연적인 일이다.
어쩌면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특징은 이러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 간의 상충 및 조화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만일 한국인인 그의 작품에서 한국적인 문화의 흔적인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일이다. 자신을 위장하거나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해 솔직하다. 미국적인 문화에 순응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간과하고 있지 않다.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의 방법론이나 테크닉은 미국에서 얻은 교육적인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 세부의 표현 또는 전체적인 이미지의 통합방식은 한국적인 정서의 발현이기에 그렇다. 이렇듯이 그는 두 가지 문화가 가지고 있는 이질성을 교묘히 합성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화판을 만들어 그 위에 신문지 따위의 인쇄물을 붙이고 다시 그 위에 한지를 덮는다. 그런 다음 아크릴컬러로 드로잉을 하고 글씨 따위의 이미지를 덧붙인다. 그러고 나서 최종적으로 세라믹을 접착제로 붙이는 것으로 끝난다. 작업과정은 이처럼 복잡하게 전개되지만 우리 앞에 놓이는 작품은 의외로 간결하다. 복합적인 표현기술 및 방법을 통일된 이미지로 이끌어가는 조형감각은 순전히 그 자신의 역량에 속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그 자신은 이질적인 문화 또는 몇 가지 서로 다른 표현기법과 방법론을 통합된 이미지로 귀결시키는, 일테면 용광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어떤 재료 및 아이디어일지라도 그 자신이 추구하는 통일된 조형적인 질서로 귀속시키는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작업과정에서 어떠한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작품이 보여주는 질서정연한 형식미는 그 자신이 산출해낸 특별한 조형적인 수식의 결과인지 모른다. 그 만큼 작업과정 전체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뿌리기라는 표현기법에서는 절반은 우연성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로부터 자연성과 자유가 느껴진다. 만일 뿌리기가 없다면 모든 기법은 시종 치밀한 계획 아래 지배되기 십상이다. 그럴 경우 작품의 이미지는 경직성을 피하기 어렵다. 실제로 신문지를 재료로 하는 꼴라지라든가, 채색작업, 한지작업, 글씨, 부호, 기호, 그리고 세라믹 따위의 작업방식은 계획된 상황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전개된다.
이제 그의 작업 세부를 들여다보자. 패널의 형태는 작품의 기본 골격, 즉 형태미와 직결된다. 정방형 및 장방형 또는 곡면형 그리고 곡선형의 패널이 조합하여 하나의 작품이 된다. 이처럼 몇 가지 형태의 패널이 조합하게 되면 어떤 특정의 부호나 기호가 형성된다. 가령 바람개비라든지 태극, 나비, 꽃, 피아노 건반, 풀잎 따위의 이미지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이미지가 작품의 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체적인 이미지 통합 및 소통에 필요한 장치이면서도 내용에 관여한다. 이들 이미지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자연미와 미국적인 자유, 그리고 미국적인 정서와 한국적인 정서의 융합을 내용으로 하는, 그의 작업 전체를 함축하고 압축하는 것이다.
인쇄물의 꼴라지나 글씨쓰기 따위는 시대상황 및 시대정신 그리고 시대감각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이국적인 문화의 수용을 상징한다. 현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세상을 향한 그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은닉된다. 내면의 언어가 되는 셈이다. 인쇄물의 꼴라지를 한지로 덮는다는 것이야말로 내면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기교이다. 그 위에 뿌리기가 덧붙여지는데, 이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도적인 부분이 적지 않다. 우연성 또는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뿌리기는 감정의 흐름을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이미지와 연관성이 있다. 뿌리기는 일테면 감각적으로 세련된 표현기법에 역행하는 자연성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인 셈이다.
이와 함께 마치 수묵작업이나 수채화 작업의 선염, 즉 번짐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는 한지작업과 함께 한국적인 정서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번짐 기법은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강하다. 이 역시 신비주의적인 토속신앙이나 동양사상의 체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조형적인 기교가 아니라, 한국적인 정서의 표출인 것이다. 물론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는 세라믹 작업에서도 은연중에 한국적인 정서가 묻어난다. 세라믹에는 바닷가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감각이 살아있다. 새, 물고기, 나비, 꽃, 구름, 산, 풀잎, 나뭇잎 따위의 형태가 드러나는 것은 바닷가 고향의 정서를 반영했음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잠재의식에서 걸러낸 파편들이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문신과 같은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자연의 이미지가 아니라, 고향을 연상케 하는 어린 시절의 ‘흔적’인 것이다.
세라믹은 입체작업이다. 비록 조그만 소품일지언정 세라믹 작업 하나하나에는 입체적인 공간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다. 그 형태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지극히 세련되어 있다. 그만의 타고난 조형적인 감각의 소산이다.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패널이 인위적이라면 세라믹은 자연적이다. 거기에는 만든다는 의도적인 감각이 배제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자연스럽다. 인위적인 패널 위에 자연적인 세라믹을 대입시킴으로써 긴장감이 감돌면서도 기묘한 조화가 이루어진다. 세라믹의 존재는 마치 고분발굴현장을 연상시킨다. 그렇다. 세라믹은 그의 의식, 즉 내면 깊은 곳에서 불현듯 솟아오르는 잠재의식의 파편이자, 추억의 흔적이다.
이제 정리하자. 평면과 입체, 부드러움과 강함, 인위성과 자연성, 미국적인 정서와 한국적인 정서라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그의 조형적인 공식은 시대감각에 일치한다. 복합적이면서도 다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업은 미국에 사는 한국예술가인 그에게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새로운 체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 및 표현방법의 확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자신의 예술세계를 가꾸는데 보다 비옥한 토양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듯이 새로운 문화를 흡입하고 소화하여 새로운 미적가치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흔적’(작품 명제)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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