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칼럼>‘ “후배들 밥이나 사며 지내야···”
| 2013. 03.27(수) 11: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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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나직한 목소리가 뒷전에서 들렸다. “당신이, 바로 원로야··· 당신들이 바로 원로란 말이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병문 전문교장관이셨다. 그냥 지나가는 말 처럼 담담한 투였다. 순간 좌중이 조용해졌다. 진짜 원로가 계신 것을 깜박한 것이다.
그때는 장차관정도 높은 벼슬 한 분들은 퇴임한 후 대개 서울에 살았다. “원로들 왜 안돌아오나, 고향에서 할 일이 없기 때문인가, 한 일이 없기 때문인가”라는 칼럼이 나올 때였다. 그런 와중에 ‘오장관’은 광주에 계시면서 가끔 묵직한 한 말씀으로 지역사회의 흔들림을 잡아주셨다.
‘우리 나이가 얼만데? 60도 안된 50대 중반에, 우리가 원로라니?’ 뜬금없어 말대답도 못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당신들은 원로를 비판할 만큼 무슨 일을 했는가? 자기 앞이나 잘 살펴라’는 뜻이셨을 것 같다. 덕분에 다음부터는 ‘원로’를 거론하려면 조심스러워졌다. 혹시 말 하더라도 군더더기 같은 뒷말은 삼갔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원로’라는 말이 너무 흔해졌다. TV채널이 많아져서인지 ‘원로’라고 소개되는 분들이 수도 없이 화면을 장식한다. 고령화 사회 탓도 있을게다.정계, 재계, 문화계, 종교계, 예술계, 학계, 교육계, 의료계, 연예계····. 흔해진 만큼 값도 떨어졌다. 달인과 원로를 혼동하는 경우도 생긴다.
원로란 무엇인가. 나이가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나라에서 주는 벼슬이름도 아니다. 많은 사람이 대접해 모실 때 생겨나는 무형의 자산이다. 도올 김용옥은 <효경 한글역주>에서 ‘원로란 젊은이에게 법언(法言; 바른 도리로 법도가 되게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노인’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원로는 전면에 자주 나서지 마라. 특히 TV에 나서지 말라’고 충고했다.
‘노마(老馬)의 지혜’란 고사가 생각난다. 춘추전국시대 강국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이 고죽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었다. 그는 늙은 말을 앞세웠다. 많은 군대가 혹한의 산골짜기에서 빠져나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역사에서는 늙은 말이 원로 구실을 했다.
그러나 늙은 말을 짐수레에서 풀어내 그 뒤를 의심 없이 따라간 관중이 없었더라면 늙은 말이 ‘원로’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원로를 만드는 사람은 힘을 가진 리더이다. 권력자가 큰일을 하면서 방향을 못 잡고 흔들릴 때 모셔다가 한 마디 듣는 자리에서 원로가 탄생한다.
‘얼마나 힘 가진 사람들이 안 알아주었으면····’ 요즘 ‘각계원로’들이 TV에 자주 나타나는 상황을 그렇게 지레 짐작해본다. 그렇다고 힘 있는 사람대신 보통 젊은이들이 그들을 대접해 모실까?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 결혼도 연애도 애 낳는 것도 포기하는 ‘삼포세대’, 노후대책 없이 직장서 밀려나는 ‘베이비부머’들, 다들 내 앞가림 하나하는데도 벅차다.
사실 인터넷 시대엔 나이든 사람들의 경험과 지식이라는 게 별 도움이 안 된다. 동네 토박이 노인보다 스마트폰이 골목길 안집까지 훨씬 잘 안내한다. 손자가 아플 때 할머니의 대를 이은 노하우가 인터넷 검색 한 번에 손을 든다.
모임에서 얼마 전 정년퇴직한 교수 한 분을 만났다. 십 수 년 전 ‘당신이 바로 원로야’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 중 한 분이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인사로 물었다. 요즘같이 일자리가 귀한 시절, 만 65세 되도록 밥벌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후배들 밥이나 사며 지내야지요.” 그래 ! 젊은이가 모시는 어른이 아니라 스스로 젊은이를 챙기는 어른! 원로가 소용없는 시대에 베풂이 있는 새 원로상을 보았다.
◇ 김종남(광주전남언론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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