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칼럼> 곁에 두고 며칠 찾다니····

2012. 04.21(토) 11:44

며칠 동안 안보이던 만년필을 찾았다. 서재 필통 안에 거꾸로 꽂혀 있었다. 필통이랬자 컵처럼 생긴 도자기라 꽂혀 있는 것들이 다 드러나 보인다. 필통에는 볼펜, 붓펜, 연필, 싸인 펜까지 필기구들이 열 댓 개 빼곡 차있지만 그동안 몇 번이나 뒤져보았었다. 만년필이 키가 작긴 해도 어째서 못 보았을까.

그 안에 있지 않을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건성건성 넘겼는가 보다. 만년필은 잉크를 담아 쓰는 불편 때문에 밖에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집안 어디에 틀림없이 있긴 있을 것이다’는 믿음이 있었다. 또 평소에 다른 물건도 놓아둔 곳을 잊고 찾는 일이 가끔 있어 이번도 그러려니 안심하긴 했었다.

그래도 글을 쓸 때마다 혹시 소파 방석틈새에 끼었나, 또는 책상 뒤편으로 넘어가 떨어져있지 않나 여기저기 둘러보았었다. 없어져보아야 진가를 알 수 있다더니 없으니 아쉬운 일이 많았다. 무언가 손이 허전했다. 그런데 바로 코앞에 두고서 엉뚱한 곳만 헤맨 셈이다. ‘업은 아이 삼년 찾는다’는 속담을 실감했다.

베스트셀러 <남자의 물건>을 쓴 김정운은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는 물건’으로 ‘만년필’을 꼽는다. 그는 그의 ‘길들여진 만년필’ 속에 ‘사랑하지만 뛰어넘고 싶은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반항심을 드러낸 자신의 역사(歷史)가 들어있다’고 소개한다.

내 만년필은 나에게 무슨 ‘역사’일까. 초년기자 시절에는 책상마다 잉크병이 있었다. 몇 자 쓸 때마다 펜촉으로 잉크를 찍어 썼다. 만년필은 사치였다. 잉크 펜 다음엔 바로 컴퓨터 시대였다.

십 여 년 전, 시인 고은선생과 소설가 송기숙선생이 나누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컴퓨터시대인데도 고은 선생은 시를 쓸 때 잉크를 찍어 쓰는 펜을 고집해서 쓴다고 했다. ‘잉크를 찍는 여유, 거칠거칠한 펜이 종이 위를 사각사각 누르는 그 감촉, 종이에 잉크가 번지는 그 느낌을 즐긴다.’ 그렇게 말한 걸로 기억한다. 송기숙 선생은 타이프라이터로 글을 쓰다가 컴퓨터로 바꾼 후 상당기간 글이 잘 안 나오더라고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부터는 컴퓨터 앞에 앉아야 글이 써진단다.

나도 이젠 컴퓨터 앞에 앉아야 글이 나온다. 생각나는 대로 문자판을 두들기고 본다. 글이 잘 안 풀릴 때가 있다. 만년필을 손에 쥔다. 만년필로 종이위에 글자를 그린다. 생각도 잉크처럼 흐른다. 십 수 년 손에 익은 만년필은 때때로 나에게 오래된 기억의 창고를 여는 열쇠 역할을 한다.

돌이켜보니 한 달에 한 편씩 이어온 글이 3년을 넘었다. 정성을 다했다. 나름대로 불공을 드리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끝내 의문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글이 종이값은 할까’. 사람이 산다는 것은 밥값을 하는 것이다. 글쟁이의 글은 종이값 잉크값은 해야 한다. 누군가 읽고서, 살아가는데 한 움큼이라도 힘을 얻을 수 있어야 종이값이 된다.

어떤 글이 삶에 힘을 불어 넣을 수 있을까. 자동차 매연 속에 솔잎바람 한 줄기, 목마를 때 샘물 한 모금이 될 수 있을까. 내목이 타보아야 물 한 모금이 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이 숨 막혀 헉헉거려 보아야 맑고 서늘한 한줄기 바람이 얼마나 소중한줄 안다. 내가 위로받을 수 있어야 남을 위로할 수 있다. 그런 글감을 위해 밥 먹고 걷고 샤워했다. 잠이 들어서도 잊지 않았다.

“배고픔, 맨발로 걷기, 죽음예보, 하루 2식, 잠, 책, 편안함, 뜨거운 눈물, 인연, 옷, 기도, 시, 꿈, 시간의 주인, 기다림, 고통, 나의 쓸모, 신바람, 사람다운 맛, 불평 없는 세상, 즐거운 일, 행복리스트 ····· ” 날마다의 생활은 화두와 화제 보따리였다.

글감은 마치 잃어버린 만년필이 서재 필통 안에 있듯, 내가 이미 들었던 것, 보았던 것, 배운 것, 체험한 것, 지금 삶속에 있었다. 어떻게 글로 엮어 내느냐는 과제만 남는다. 글의 시작은 어렵다. 주춧돌 놓고 기둥세우는 것처럼 어렵다. 그러나 글의 마무리는 시작보다 더 어렵다. 지붕 덮기처럼 힘 든다.

생물학자 최재천씨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고 말한다. 생명이 없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생명은 끝, 곧 죽음이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는 뜻이 있다. 글도 생명체처럼 시작과 끝이 있다. 끝이 있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

사철 꽃 속에 사는 하와이 사람들이 꽃구경하러 한국의 봄을 찾는다. 매서운 겨울 뒤에 폭죽처럼 터지는 꽃들의 향연을 보려고 한국을 찾는단다. 하와이에는 겨울이 없다. 겨울의 죽음이 없으면 생명이 움트는 꽃들의 향연도 있을 리 없다.

죽음이 없는 것은 생명이 아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의 가슴을 울릴 수 없는가 보다. 하얀 종이위에 만년필로 까맣게 문자를 그려본다. 문자들이 펜촉 끝에서 용틀임하듯 살아 움직인다. 마침표를 찍는다.

김종남 <언론인>

mtong@mtong.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