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칼럼> 내 ‘행복리스트’는 뭣인가
| 2012. 02.20(월) 10: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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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한 동서는 ‘행복하게 잘 살아라’, 요지의 교훈 하나만 말하라고 했다. 동서는 지금도 제자들 주례를 많이 서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짧게 해라’는 말은 다 했다.
그래서 신랑신부에게 줄 좋은 격언 하나를 골라보려고 고심했다. 문장대백과사전까지 찾아보았다. 결혼에 대한 격언은 참 많았다. 속담, 명언, 어록, 일화도 엄청났다. 너무 많으니 더 고르기 어려웠다.
‘왜 이렇게 말이 많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건 그만큼 결혼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 아닐까? 기대가 적다면 말이 많을 필요가 없다. 또 한편, 그만큼 실천이 어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금언이래도 실천이 안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한마디격언’은 무엇일까. 숙고 끝에, ‘1년짜리 행복리스트를 만들어라’는 주례사를 했다. ‘결혼 1주년기념일까지, 1년 안에 부부가 같이 실천할 수 있는 행복한 일 세 가지를 써라. 예를 들어, 지리산 둘레 길을 같이 걸어보겠다, 햇볕 따뜻한 봄날, 좋은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을 마시겠다, 좋은 뮤지컬을 같이 보겠다. 등등. 거창한 일 말고도 마음만 먹으면 실천할 수 있는 행복한 일이, 찾아보면 가는 데마다 널려있다. 행복하려면 뒤로 미루지 말고, 행복을 위한 일을, 당장 실천하라’는 요지였다.
‘하와이 여행 가겠다, 크루즈 세계여행을 하겠다. 등등. 돈이 많이 들어가는 리스트는 10주년 결혼기념일이나 20주년 결혼기념일 리스트로 멀리 잡아놓으라’고 덧붙였다.
사실은 며칠 전 TV에서 본 ‘행복강의’를 벤치마킹해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그 강의에서 강사는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보여주었다. 어머니사진 뒷면에 써놓은 리스트, ‘어머니를 모시고 세계여행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버킷리스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이었을 것이다. 그 강사는 어머니 살아계실 때 그 리스트를 실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자신이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그 사진을 품고 간다고 했다.
주례사, 5분도 안 걸렸다. 신랑 신부가 그냥 흘려들었을지, 아니면 얼마 후에라도 한 번 기억이 나 실천해볼지 아직 모른다. 씨앗은 뿌린 셈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의문이 생겼다. 내 ‘행복리스트’는 무엇인가. 있기나 한가. 내가 실천해보지도 않고 내놓은 이야기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겠나? 체험이 뒷받침되지 않은 격언은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것은 강원도 두메산골, 화전민 오두막에서 홀로 밥짓고 군불때고 빨래하고 기도하며 지낸 스님의 수행이 뒤받쳐 주었기 때문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一日不食)’던 백장선사는 제자들이 스승의 노구를 걱정하여 농기구를 감추자 종일 굶었다.
가만 돌이켜보니 나에게도 행복리스트가 있긴 있었다. ‘제주 올레길 여행’. 몇 년 전부터 집사람에게 ‘언제 가보자’고 얘기했었다. 지금까지 실행은 못했다. 아직 거짓말은 아니다. 기한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행복리스트도 버킷리스트처럼 시한이 있어야겠다. 시한부가 힘이다. 드라마 <여인의 향기>에서 6개월 시한부생명을 선고받은 여주인공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그녀는 노트에 써 놓은 20개나 되는 리스트를 실행하는 대로 하나씩 지운다. ‘몇 개월 뒤엔 내가 세상에 없다’는 절박감이 20개를 6개월에 모두 지워낸 원동력이다.
세상일도 드라마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시한부인생을 피할 수 없다. 6개월이냐, 6년이냐, 60년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불후의 좋은 글, 좋은 그림, 음악들도 마감시간에 쫓겨야 나온다. 나도 내 행복리스트의 시한을 정해보자! 주례사에서 제시한 것처럼 ‘1년’을 잡아본다. 시간이 정해지자 현실감이 느껴진다. 강박관념도 생겨난다.
그러자, 다른 의심이 일어난다. ‘무소유’, ‘부작불식(不作不食)’에는 시한이 없다. 평생 수련해도 지울 수 없는 리스트이다. 행복리스트에도 꼭 시한이 필요한 것일까. 시한을 넘기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한다면 성취감도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시한을 넘긴다면 ····.
김종남<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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