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칼럼> ‘나무이름’ 한 번 불러보세요
| 2011. 10.19(수) 21: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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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옆에 늘씬하게 잘 빠진 나무가 하나 있다. 3층을 넘어서는 훤칠한 키, 가장 큰 나무다. 곧게 뻗은 본줄기에 잔가지도 수 십 개 시원스럽게 펼쳐 애기 손바닥 같은 앙증맞은 잎사귀들을 수 십 만장 달고 있다.
얇은 잎들이 햇볕을 받을 땐 말갛게 빛을 투과시켜 마치 맑은 수채화를 보는 것 같이 아름답다. 사람으로 치면 TV드라마에 나오는 예쁜 여배우가 연상된다. 자그맣고 동그란 잎사귀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하트형이다. 코에 가까이 대면 달콤한 향기가 난다.
여름에는 포플라잎처럼 실바람에도 녹색을 반짝거리고, 가을에는 한 잎 한 잎씩 은행잎처럼 황금빛 단풍으로 물든다. 그러다 겨울 되기 전 다른 나무들보다 일찍 깨끗하게 낙엽진다. 어느 풍경화가 이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 바람 따라 계절 따라 달라지는 살아있는 그림.
나무이름을 알고 싶어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나다 보니 관리실 옆에도 한 그루 있었다. 관리실 직원에게 물었다. 똑같이 ‘모른다’는 대답이다.
나무이름을 모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다들 나무이름에 신경 쏟을 만큼 여유롭지는 않을 테니까. 나 역시 10여년 이 아파트에 살면서 가끔 멈춰 서서 풀이나 나무를 쳐다보게 된 것은 기껏 몇 년도 안 된다. 더구나 이 나무이름을 알고 싶어진 것은 최근 일이다.
시인들이 쓴 <교실 밖으로 걸어 나온 시>란 책은 “여러분 주위에는 어떤 나무가 있나요? --- 알고 있는 나무이름을 한 번 헤아려 보세요. --- 많은 나무들이 그냥 ‘나무’일 때와 이름을 알고 있을 때랑은 퍽 다릅니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위 아래층에 사는 이웃도 몇 달 동안 못 마주치는 경우가 많다. 이 나무는 드나들 때마다 매일 몇 차례씩 만난다. 이름도 모르면서 좋아할 수는 없지----.
숲 해설사인 동생에게 나무이름을 물어보았다. ‘계수桂樹나무’란다. 잎으로 월계관을 만드는 월계수도 아니고, 껍질을 벗겨 계피를 얻는 계수나무도 아닌 관상용 정원수이다. 계피를 만드는 계수나무는 녹나무과이고, 아파트의 계수나무는 계수나무과로 서로 과가 다르다. 나뭇잎을 손으로 부비면 솜사탕 냄새가 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아, 달콤하게 느껴진 향기가 바로 그 냄새였구나!’ 냄새는 추억을 불러온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앞, 불에 달군 원통을 발로 돌리면서 솜처럼 날아오르는 솜사탕을 나무젓가락으로 돌돌 말던 그 구루마꾼, 그때 솜사탕과자는 마치 구름을 떼어 먹는 것처럼 신기했다.
이름을 알고 보니 역시 더 좋아졌다. 옛사람들이 달 속에 있다고 상상한 그 ‘계수나무’가 바로 이 나무 아닐까? 노랗게 물들어 떨어져 내린 계수나무 낙엽 몇 개를 주워왔다. 책상에 올려놓았다. 사탕 냄새가 은은하게 풍긴다. 단 맛이 날 것 같다.
긴 여름내 뜨거운 태양 볕을 함빡 머금었던 결실이 향기로 풀려나온다. 단맛 향기는 역시 수확의 계절, 가을 맛이다. 낙엽 향기에서 뜨거운 여름과 풍성한 가을을 한꺼번에 맛본다.
계수나무 덕분에 아파트 뒷문 쪽에 병풍처럼 늘어선 ‘광나무’도 알게 되고 일년생 풀꽃 ‘설악초雪嶽草’도 알게 되었다. 물푸레나무과의 광나무는 땅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빽빽한 잎들 밖에 안 보인다. 겨울에도 잎들은 반짝반짝 진녹색 광光을 낸다. ‘설악초(snow-on-the-mountain)’는 이름 그대로 ‘산위에 눈’이다. 하얀 눈이 이파리 위에 내려앉은 듯 회녹색 잎들이 흰색테두리를 둘렀다.
세상에 나무 수는 사람 수보다 훨씬 많다. 그 중 날마다 만나는 나무는 몇이나 되나. 아파트 드나들 때 마다, 나무이름을 불러본다. 무언의 화답을 듣는다
김종남 <언론인>
mtong@mtong.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