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칼럼> 거울 하나 가지고 있습니까
| 2011. 04.29(금) 23: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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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경사라 숨이 차다. 고개 마루 턱에 묘지 하나가 오동나무 아래 댕그라니 자리 잡고 있다. 제단축대에 걸터앉았다. 마침 솔밭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싱그러울 수 없다. 신록이 눈에 시원한 오후 4시 햇볕도 적당히 따사롭다. 차분히 땀을 식히고 있는데, 누군가 나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평소 같으면 인사라도 건넸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은 봄 햇살에 솔바람까지 그 고요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깨기 싫어 시선도 돌리지 않고 가만히 경치만 즐기고 있었다. 채 일분이나 되었을까. 옆 사람이 툭 말을 건넸다. "내려가시는 길입니까?" 나는 그제서야 옆을 돌아보며 "아닙니다. 팔각정 가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저는 하루에 두어 시간씩 매일 이렇게 무등산을 오르내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가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냥 누구에게나 말을 붙이게 됩니다."분위기 깬 것을 양해해 달라는 뜻인가 보다. 산에서야, 만나는 사람마다 다 친구이자 이웃 아닌가. 그런데도 그는 눈치를 보면서 길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한 눈에 보아도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은 수심이 가득했다. 마치 세상의 근심을 혼자서 다 떠맡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너무 괴롭고 견디기 힘들어서요---, 누구에게나 매달리고 싶어집니다."정말 딱한 노릇이다. 나도 10여년 전 한 달여 불면증에 시달린 기억이 난다. 그때 가벼운 증세였는데도 참 참기 힘들었었다. 내가 겪은 불면증이 감기라면 이 사람이 고통 받고 있는 우울증은 아마 폐렴 정도일 터인데, 내가 도대체 무슨 도움말을 줄 수 있을까 답답해졌다.
그런데 이 사람은 벌써 5~6년째 우울증을 앓고 있단다. 올해 59세. 겉모습으로는 60대 중반쯤 되도록 늙어 보인다. 20여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그만 둔 지 8년째, 매일 운동을 하고 약을 먹으면 약간 좋아졌다가 또 재발한다고 한다. 몸은 건강하다. 마음이 문제다. 의욕이 없다. 식욕도 있을 리 없다.
“그래, 원인은 무엇입니까?”"갈 데가 없어요." 보나마나 한창 일할 나이인 50대에 들어서자마자 실업자가 되었는데 직장은 구해지지 않지, 갈 데는 없지, 스트레스가 쌓여 병이 되어버린 것 같다. “먹고살 것은 있습니까?” "그저 굶어죽지 않을 만큼은 되지요."“종교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비워보시지요.”"다들 그래보라고 하는데 잘 안됩니다. 쉬운 일이 아니데요"갑자기 사업가 친구가 나에게 들려주었던 경험담이 생각났다. 그거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혹시, 지금 거울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요."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물론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물은 건 아니다. “지금 내려가시면 조그만 손거울을 하나 사시지오. 그리고 하루에 열 번 스무 번 아니 그보다 더 많이 그 거울에 얼굴을 비쳐보시고 웃는 얼굴을 지어보십시오.” 그 사람은 좀 엉뚱한 듯 말을 못하고 ‘무슨 뜻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10여 년 전 내 친구는 부도위기에 몰렸다.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게 없었다. 그 친구는 하도 어려워 점술가를 찾아갔다. 점술인은 친구에게 '거울에 얼굴을 비쳐보라'는 처방을 내렸다. 그 말대로 친구는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쳐보고는 놀랐다. 잘나고 못나고가 아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자기가 보기에도 겁이 날 정도로 무서웠다. 그 다음부터 그는 자주 거울을 쳐다보며 얼굴을 펴고, 긴장을 풀었다. 그 이후 그의 사업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사업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그러나 막상 내 설명을 듣고도 우울증에 걸린 그 사람은 "웃어요? 웃을 일이 없는 데요"라고 반문한다. “아무튼 억지로라도 웃는 얼굴을 만들어보세요. 그러면 마음도 자연히 따라갈 겁니다. 그거 하나만 한번 열심히 해보세요.”
"그럴까요" 긴가민가하는 심드렁한 표정이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고갯길을 내려가는 구부정한 그의 등에 대고 다시 다짐을 했다. “꼭 그렇게 해보세요! 틀림없이 좋아질 겁니다!!”
김종남<언론인> jnkim45@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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