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칼럼> 맛의 근본은 배고픔이다
| 2010. 08.15(일) 08: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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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졸병 훈련 때 얻어먹었던 라면 맛을 잊지 못해 집요하게 그 맛을 되살려보려는 한 사내의 이야기다. 그 사내는 그때 그 라면을 끓여주었던 옛날 상사를 찾아내 그 맛의 ‘비결’을 알려달라고 졸라댄다. 이제는 유명한 요리사가 된 옛 상사도 그 맛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시도해본다. 라면도 바꿔보고 양념도 바꿔보고, 그러나 실패한다.
그러다 어느 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깨닫는다. 그 맛이란 게 요리솜씨나 재료 탓이 아니라 그때의 상황이 빚어낸 작품이란 것을-. 억수같은 비에 젖은 채 혹독한 집단기합을 받아 지쳐 떨어진 쫄병 앞에 놓여진 라면 한 그릇의 맛을 어떻게 배부른 사람들이 재현해낼 수 있겠나. 그 쫄병이 눈물을 흘리며 먹은 ‘세계최고의 맛’이 꼭 라면일 필요가 있었겠나?
물먹은 건빵 한 조각이라도 꿀맛 이었을 게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길을 가면서 먹었던 ‘묵’얘기와 같은 맥락이다. ‘은어’라고 멋있는 이름까지 하사했던 선조는 난이 끝나 궁에 돌아온 후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그 묵(은어)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맛이 아니었다. 그래 ‘도로 묵이라 해라’고 해서 ‘도루묵’이 되었다는 설화이다.
그때의 상황, 그때의 배고픔이 그 맛을 있게 해준 비결이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입으로 들어가는 모두가 다 천하진미일 수밖에.
문제는 배고픔을 철저히 몸으로 겪어본 쫄병도 상사도 임금님도 ‘맛의 근본이 배고픔’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점이다. 배고픔을 통해야 맛을 얻을 수 있는데 배고픔을 생략하고 바로 맛만 얻어내려 했으니 실패만 거듭했을 수밖에.
요즘 사회문제가 된 자살급증도 ‘배고픔’이란 화두로 풀어보자.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29개 회원국 중 1위이다. 7년전 4위이던 것이 올해 1위로 뛰어올랐다. 아무리 한국이 1위를 좋아한다지만 자살률까지 1위가 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젊은이들의 자살이 더 빠르게 급증한다는 점이다.
한국인 20-30대는 사망원인 중 첫 번째가 자살이다. 지난달에는 연예인들의 자살이 시끄럽더니 인터넷에 자살사이트까지 등장, 집단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욕망과 정열이 넘쳐야 할 젊은이들이 왜 스스로 숨쉬기를 포기하는가. 자살이유를 보면 ‘염세, 비관’이 46%로 거의 절반이나 된다.
‘염세’를 속된 말로 하자면 ‘세상살 맛이 안 난다’이다. 인생이 음식이라면 염세자살은 맛이 없다고 음식 먹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음식이 맛이 없으면 누가 먹으려 할 것인가. 살맛이 없으면 누가 살려고 할 것인가.
살맛은 어디서 나올까. 삶에 대한 배고픔에서 나온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어떤 삶이든 맛이 나게 만들 육체적인 굶주림이란 것을 잘 모른다. 영화로 보거나 말로는 들었겠지만 긴 시간 동안 배고픔이나 굶주림을 실제로 체험해본 젊은이들은 아마 적을 것이다. 그러니 헝그리 정신도 당연히 없다.
배고픔을 심하게 겪어본 50-60대도 옛날 배고픔이 가르쳐 주었던 교훈을 잊어버리고 맛만 찾으려고 나대는데 굶주림을 몰랐던 젊은이들이야 진짜 사는 맛이 어떻게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으랴. 한두 번 배부른 시도를 해보다 세상살 맛이 없다고 절망한다.
한국인 최초로 동경대 교수가 된 재일교포 강상중씨(59)가 베스트셀러를 썼다. ‘고민의 힘’이라는 책은 펴 낸지 일 년도 안 되어 일본에서 백만부 이상이 팔렸다. 관심을 끄는 것은 강교수가 그 책을 쓰게 된 동기이다.
자살이 급증하는 사회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야하는 의무감에 “자살을 막을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강 교수는 지금의 일본 젊은이들이 사회적 차별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극심한 가난과 사회적 차별을 견뎌내며 살아남았던 재일교포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살맛을 찾지 못해 혼란을 겪고 있는 점에서 한국의 젊은이들도 일본의 젊은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배고픔이란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맛을 찾으려 하는 점에서도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재일교포가 아니더라도, 50대가 넘은 한국의 나이든 어른들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사는 맛의 근본이 배고픔이라는 것을 체험해보았다. 그러나 그 진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그 결과 오늘날 ‘자살률 1위’의 비극이 빚어졌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김종남<언론인> jnkim45@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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