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我石齋
2011. 10.01(토) 21:51확대축소
호남을 예향(藝鄕)이라고 부르는데, 전남이 의재(毅齋)와 남농(南農)을 중심으로 한 그림 쪽이 강한 분위기이고, 전북은 강암(剛菴)을 중심으로 한 글씨(書藝)라고 할 수 있다.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이 근래 호남 서예계의 장문인급 역할을 하게 된 배경에는 글씨도 글씨이지만 그가 86세까지 살면서 보여준 처신과 행실이 더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평생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생활했다. 주변에서 "왜 그렇게 불편하게 사느냐?"고 물으면 "나를 평생 지켜준 것은 갓과 상투였다"고 대답하곤 하였다. 상투와 갓은 유학자(儒學者)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수시로 환기시켜주는 장치였던 것이다. 강암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상투와 갓을 끝까지 지키라는 부친의 유언을 지켰다. 그의 부친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1882~1956)은 '호남 3재(齋)'가운데 한명으로서 구한말 기호학파의 종장이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뛰어난 제자였다. 유재는 '필불여문 문불여행'(筆不如文 文不如行)으로 소문난 학자였다. 그의 '글씨도 좋지만 글씨는 문장만 못하고, 문장도 뛰어나지만 그의 행실은 더 뛰어나다'는 평가였다.

이런 아버지로부터 훈도를 받은 강암은 자신의 자식들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송하진(58) 전주시장은 강암의 4남인데 '지기추상(持己秋霜) 대인춘풍(待人春風)'으로 자신이 받은 가정교육을 요약했다. '자기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자기 잘못에는 한없이 너그럽고 타인의 조그만 실수를 쫀쫀하게 따지면 안 된다는 말이다. 씨가 좋아서 그런 것인가, 가정교육을 잘 시켜서 그런 것인가.

강암은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장남은 관선 전주시장을 지낸 송하철이고, 2남은 성균관대 유학대학장을 지낸 송하경이고, 3남은 고려대 문과대학장을 지낸 송하춘이다. 이들 형제들도 아버지로부터 "우리 집은 삼시 세 끼 밥만 먹고 살면 된다. 직책을 맡으면서 돈을 모으면 절대 안 된다"는 당부를 수시로 들었다. 전주 교동 한옥마을의 강암이 살던 집 아석재(我石齋)의 편액 글씨는 당대 명필 소전(小筌) 손재형(孫在馨)이 썼고, 남취헌(攬翠軒)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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