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雪軒

2011. 10.01(토) 20:49

봄에 내리는 눈을 옛 사람들은 귀하게 여겼다. 남송의 나대경(羅大經)이 쓴 약탕시에 보면 ‘일구춘설승제호(一?春雪勝醍?)’라는 대목이 나온다. ‘한 사발의 봄눈은 제호보다 낫다’는 뜻이다. 여기서 구(?)는 조그만 사발을 가리키고, 제호(醍?)는 정제한 버터로 아주 맛있는 음식을 뜻한다. 차(茶) 대신에 봄눈을 사발에 담아 녹여 먹는 풍류를 즐겼던 모양이다.

3월에 내리는 춘설을 보면,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춘설헌(春雪軒)’에 가보고 싶다. ‘춘설헌’이라는 명칭도 나대경의 시구에서 따왔다. 춘설헌은 남종화(南宗畵)로 유명한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이 1958년에 지은 화실이자 살롱이다. 무등산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증심사(證心寺) 조금 못 미쳐 오른쪽 개울을 건너 150m쯤 가면 나온다. 시내와 가까우면서도 숲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원래 방 2개에 화실과 마루가 있는 자그마한 집이었지만, 찾는 손님이 많아지자 옆에 방을 더 늘렸다. 차를 좋아했던 의재는 시간 나는 대로 무등산에 올라가 차밭을 가꿨다. 술 대신에 차를 많이 마셔야 나라가 흥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무등산 신선’으로 불린 의재는 동양사상과 시(詩) 서(書) 화(畵)에 두루 통한 데다가, 나라를 걱정하는 지사였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니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석 유영모, 지운 김철수, 효당 최범술, 함석헌 등이 자주 찾아와 며칠씩 묵어가곤 하였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도 두 번이나 춘설헌을 방문했다. 의재가 지닌 동양적인 풍모와 식견에 반해서였다.

이들 손님들이 오면 같이 무등산 차밭을 산책하며 한담을 나누고, 오후가 되면 춘설헌에 모여 그림을 그리면서 서로 같이 놀았다. 7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함석헌도 머리가 아프면 쉴 겸 해서 춘설헌에 자주 왔는데, 의재는 10년 연하였던 함석헌에게 “젊은 사람들 너무 흥분시키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광주가 예향(藝鄕)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의재와 같은 일급 인물이 춘설헌과 같은 멋진 살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mtong@mtong.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