順天 甲富

2011. 10.01(토) 20:30

이번에 워런 버핏의 재산 사회 환원을 보면서 과거 한국 부자들의 ‘기부(寄附) 전통(傳統)’을 더듬어본다. 일제시대 호남의 대지주 가운데 한 명이 순천의 갑부(甲富)였던 우석(友石) 김종익(金鍾翊·1886~ 1937)이다. 우석의 재산은 그의 아버지였던 김학모(金學模·1860~1925)가 벌어놓은 것을 물려받았다. 김학모는 무과(武科) 합격자였지만 한말(韓末)에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고리대금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시골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장리 빚’을 놓았던 것이다. 장터에서 급전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돈을 빌려주고 그 담보로 땅문서를 잡아두는 방법이었다. 물론 이자는 고리(高利)였다. 만약 빌려간 사람이 약속 날짜에 빚을 갚지 못하면 담보로 잡았던 땅문서를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김학모의 고리대금업 전성기 시절에는 너무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한쪽 허리춤에는 누른 밥 주머니를 매달고, 다른 쪽에는 짚신을 달고 장터를 누볐다고 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모은 재산이 논(沓) 300만 평, 즉 1만5000마지기였다. 이는 밭(田)은 뺀 숫자다. 당시 순천 일대에서는 “김학모의 땅을 밟지 않고는 서울을 갈 수 없다”는 말이 떠돌았다.

이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 김종익은 일본으로 유학해서 메이지대(明治大)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우석은 물려받은 유산을 조선제사(朝鮮製絲) 같은 사업체에 투자하여 재산을 배로 늘렸다. 하지만 우석은 아버지와는 재물관(財物觀)이 달랐다. 기본재산만 남겨 놓고 나머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임종 무렵에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175만원이라는 돈을 육영사업에 내놓고 떠난다. 오늘날로 따지면 5000억원에 가까운 액수이다. 그때 조선일보에서는 우석의 기부를 사설과 기사로 여러 차례 다루었다.

이 돈으로 서울 혜화동에 여자 의사를 길러내기 위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우석대의 전신. 뒤에 고려대 의대로 통합)와 부속병원을 함께 세웠다. 그리고 순천에는 순천농업학교(현 순천대·1935년), 순천고(1938년), 순천여고(1940년)를 세웠다. 김종익을 추적한 순천대 홍영기 교수는 이를 “호남지주 자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고 표현하였다.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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