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길: 전통미의 재발견과 새로운 형식의 제안

2011. 09.30(금) 14:14

국가마다 개별적인 이해가 얽혀 있는 일체의 무역장벽을 허물고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일원화한다는, 이른바 ‘세계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지구촌 한편에서는 거꾸로 국가 또는 각 민족간의 소리 없는 문화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문화전쟁이란 고유의 민족적인 전통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문화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고유의 문화를 다른 문화권으로 이식하려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서로 다른 문화간의 충돌을 의미한다. 문화는 경제에 비해 통제수단이나 통제력이 약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영향은 물론이요, 외부로의 전파도 용이하다. 어쩌면 세계시장경제의 단일화가 진행되면서 새삼 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것은 세계화가 국가간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앞으로의 세계는 필시 어떤 중심적인 힘을 누리는 국가의 관리체제로 들어가는, 일원화된 새로운 질서아래 놓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 새삼 민족의 존립 여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는데, 고유의 전통문화야말로 세계화에서 정체성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점이다.

이태길이 지난 10년 동안 조형적인 모색을 거듭해온 과정을 돌아보면 이와 같은 문화적인 독립성의 중요성을 자각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따위의 화풍으로 기반을 다져온 그가 이미 체질화된 화풍을 던지고 변신을 결심하게 된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 여행을 통해 고구려 벽화를 보면서 전통회화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이 그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문화적인 독립이 민족의 장래를 보장하듯이 한 작가로서의 조형적인 독립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음을 자각한 결과인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로부터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이번 개인전을 통해 비로소 그 전모가 드러나는 셈인데, 전통문화 가운데서도 역동성이 강한 전래의 춤을 회화적으로 변용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祝祭(축제)’라는 일관된 명제가 시사하듯이 공동체의 삶을 더욱 결속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축제의 한 과정 중에서 군중의 의식 및 감정을 일체화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군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어느 특정 춤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춤을 아우른다.

물론 ‘축제’라는 명제가 시사하는 바는 무슨 일을 ‘축하하여 벌이는 큰 규모의 행사’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축하하고 제사지낸다’는 뜻도 포함된다. 원래 축제의 의미는 공동체의 삶의 평안을 기도하며 조상 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보다는 무슨 일을 기념하여 ‘축하한다’는 뜻이 강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가 점차 퇴색함으로써 ‘축하한다’는 의미만이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도 ‘축제’라는 명제가 시사하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축하하는’ 것으로 압축된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에서는 의미심장한 독무보다는 대중적인 흥을 유발하는 군무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강강술래 장고춤 북춤 화관무 부채춤 농악놀이 탈춤 따위가 말해주듯이 축제 행사에서 벌이는 군무는 어떤 형태이건 대중적인 호소력이 강하다. 축제마당에서 벌이는 군무는 유연하면서도 역동적인 다수의 춤사위가 일사불란하게 반복됨으로써 흥을 유발하고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축제는 일종의 집단적인 카타르시스를 위해 기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군무는 그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공동체적인 삶의 결속에 반드시 필요했던 축제마당의 대중적인 흥을 유도하는데 긴요한 전통 춤의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변용하여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확보하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고유의 전통문화이면서 행위예술의 하나인 춤을 현대적인 조형개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보편적인 미적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뒷받침되고 있다.

고구려벽화에서 볼 수 있는 축제장면, 즉 춤추는 모습은 ‘東盟(동맹)’이라는 오늘날의 추수감사제와 같은 성격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의의 한 장면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의 작업이 ‘축제’라는 대명제를 갖게 된 것도 고구려벽화에 대한 강렬한 인상과 연관성이 있으리라는 심증이 짙다. 그렇다. 그는 단순히 고구려벽화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에만 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의 작업이 고구려벽화와의 어떤 정신적인 유대를 원하고 있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그럼으로써 전통적인 춤을 변용하는 그의 작업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축제’라는 공통의 목적과의 결속이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오늘 그의 작업이 느닷없이 나온 것이 아닌 이상, 고구려벽화에서 보았던 그 강렬한 인상이 어떤 식으로든지 그에게 조형적인 영감으로 작용했을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고구려벽화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는 방법을 피하고 있다. 적어도 그가 재현하는 형태로 제시하는 전통적인 춤사위가 창작무가 아닌 전래의 전통무이고 보면 고구려벽화와는 어떤 형태로든지 유대를 갖기 마련이다.

다만 고구려벽화와의 혈연을 천명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의 직접적인 감동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따른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면 어느 곳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님으로써 전통적인 춤이 어떤 형태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 생생한 현장의 분위기는 어떠한 것인가를 확인코자 한다. 단순히 지식의 표현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 탓이다.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미적 감흥을 맛보겠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그림으로 묘사하고 싶다는 표현충동을 느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한마디로 현장을 체험함으로써 그 생생한 춤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닌, 춤의 생동감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관중으로부터의 뜨거운 호응, 즉 춤추는 자와 거기에 참여하는 자가 일체가 되는 축제의 열기야말로 공동체적인 삶의 한 표상임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축제의 열기는 예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우리민족의 정서를 대표하는 신명의 구체적인 증거인 셈이다. 그가 그림 속에 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조형적인 형태로 변환하는 신명이 아닐까. 실제로 그의 그림에서 재현되는 춤의 이미지는 생생한 긴장감으로 넘친다. 역동적인 춤의 전개상황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조형적인 면에서 보면 춤추는 동작을 중심으로 하되 그를 보조하는 다양한 이미지와의 복합적인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춤추는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배경에 전통문화와 관련된 각종 조형물 또는 문양을 배치하는 식의 구성적인 화면이 되고 있다. 고구려벽화의 이미지를 비롯하여 단청, 꽃담, 석탑, 부도, 꽃창살, 고려청자, 분청사기, 민화, 부채, 따위의 조형물 및 민속기물이 구성적인 이미지로 들어온다. 그런가 하면 삼태극, 구름, 당초문, 창살무늬, 운학, 와당무늬, 비천상, 모란 따위의 전통적인 문양이 또 다른 구성적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더불어 축제에 참여한 군중들의 이미지를 도입하기도 한다. 수많은 군중들을 구체화시킬 수 없기에 略畵(약화) 형식의 간단한 선과 점으로 처리하게 된다. 따라서 춤추는 인물들과 이들 조형물 및 문양 그리고 군중의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지는 복합적인 구성으로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여기에서 배경을 이루고 있는 조형물 및 전통적인 문양은 대체로 평면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의 단순한 이미지로 묘사된다. 유연한 곡선 및 리듬으로 이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동적인 이미지의 군무에 대한 상대적인 이미지인 셈이다. 즉 기하학적이고 평면적인 단순함이 군무의 역동적인 이미지를 떠받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배경을 이루는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는 그림의 구성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봉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림의 주제, 즉 춤의 내용과 어떤 연관성을 가진다. 배경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춤의 내용을 보조하면서 그 내적인 의미로 자리하는 것이다. 배경을 이루는 이미지들 대다수가 전통적인 문화예술품 일색이라는 사실은 동양적인 사상과의 연계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방정색이 음양오행사상을 근간으로 하듯이 모든 전래의 조형물 및 문양은 동양적인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가령 삼태극의 경우 청적황이 천지인의 조화를 상징하듯이 모든 형태의 이미지는 나름대로 동양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이처럼 그가 동양사상을 그림의 기본 정조로 채택한 것은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그림으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재료 및 기법은 서구의 산물일지언정 그 내용 과 형식은 동양적인 정조를 기초로 해야 한다는 인식이야말로 조형적인 개별성을 위한 교두보인 것이다. 명확한 윤곽선으로 형태를 묘사하는 방식도 동양적인 표현양식의 원용이다. 고구려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명확한 선묘 회화는 동양회화에서 보편화된 표현양식인 것이다.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그림을 위해서는 명암기법 및 원근법을 기반으로 하는 서구적인 조형개념을 버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때 배경을 이루는 다양한 형태의 조형물 및 문양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도 이와 같은 동양의 조형적인 전통성을 따르는 일이다. 동양적인 조형개념으로는 모든 형상을 선묘로만 묘사할 수 있다는 하나의 준엄한 원칙이 있다. 그의 그림에서도 서구미학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일루전, 즉 시각적인 착각을 유도하는 입체적인 조형미를 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사실주의 이전의 전통적인 조형기법이나 현대적인 추상개념과도 일정한 경계를 긋고 있다. 기하학적인 이미지 또한 반드시 서구의 기하학적인 추상과 연계시킬 이유는 없다. 기하학적인 이미지는 동양회화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소재 및 대상의 형태를 명확한 윤곽선으로 규정함으로써 계율을 따르는 듯한 엄격한 조형적인 질서 속에 놓인다. 형태를 명확히 하는 것은 선묘화 중심의 동양회화에서는 하나의 원칙이자 법칙이다. 그러므로 모호하거나 애매한 표현이 없다. 물론 수묵화에서 몰골법은 형태를 암시하거나 시사함으로써 유현미를 표현하는데 긴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형태 자체의 명확성을 외면한 것은 아니다. 몰골법에서도 형태 자체는 선묘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경우는 명료한 윤곽선으로 형태를 묘사하되 사실적인 이미지를 압축하고 단순화한다. 명암기법을 배제함으로써 개략적이면서도 평면적이 되는 것이다. 평면화라는 의미도 서구적인 단색평면과는 다른 것이다. 문양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윤곽선 안에 채색을 입힘으로써 발생하는 평면적인 구조체가 될 따름이다. 이는 민화에서 볼 수 있는 채색화의 기법이거나 수묵화에서 쓰이는 구륵법의 한 원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서 색채이미지는 그 배열방식에서 역시 서구적인 채색개념과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작업을 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점차 원하는 색채이미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색채를 팔레트에서 완전하게 만들어 쓴다. 물론 서로 다른 색채를 겹쳐 칠함으로써 고상한 중간색조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중간색조는 그림의 깊이문제에 작용한다. 중간색조일지라도 그것은 작업하는 과정에서 혼색이 만들어지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처음부터 계획된 채색기법을 따르기 때문에 우연적인 색채이미지는 철저히 배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채색방식은 이미 완성된 밑그림 위에 채색을 입혀나가는 동양의 채색화 표현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색채이미지 또한 사실성에 기초하는 서구적인 기법과는 다르다. 색채배열 방식이 현저하게 다른 것이다. 음양오행사상에 근거하는 오방정색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색채개념을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방정색이 쓰이는 경우는 춤추는 인물들에 국한하는 것이 보통이다. 전통무의 복식 자체가 이미 오방정색을 기조로 하는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 배경은 가능한 한 원색을 피하여 중간색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오방정색을 기조로 하는 춤추는 인물들의 동적인 이미지가 한층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이는 그림의 주제가 되는 춤추는 장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색채대비 수법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전통적인 미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조형성을 추구하고 있다. 새로운 조형성이란 당연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담긴 한국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한국성이란 전통적인 미학사상과 민족적인 정서가 조화를 이루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한국미술의 조형적인 특징 또는 형식미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미학사상은 불교를 비롯하여 유교 나아가 도교 및 전통신앙 따위의 복합적인 정신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울러 반도라는 지리적인 조건에 따른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온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만들어낸 조형적인 특징과 결부된다.

그의 그림은 이처럼 참다운 내 것을 되찾는 작업이다. 그는 한국적인 정서를 매개로 하는 특유의 동양적인 표현양식을 보편적인 언어로 바꾸어 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다. 이미 그의 작품 곳곳에서는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조형성에 대한 새로운 제안이 떠오르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조형적인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모색 그리고 실험과정이 있었는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전의 작가들이 걷지 않은 새로운 길을 만든다는 일이야말로 창작에서 제일의 조건이다. 이를 인식하면서도 실제로 결행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이제까지의 작업 자체를 스스로가 부정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새로운 세상을 얻으려 하는 것은 역사적인 작가로서 평가받아야 한다는 준엄한 자기객관화만이 참다운 예술가의 길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전통미의 현대화라는 새로운 형식미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그 어떤 내용 및 형식으로든지 우리를 납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그의 작업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떠한 형식 및 양식이든지 간단히 소화해낼 수 있는 견고한 묘사력 및 구성력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변신을 가능케 한 제일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는 시선을 내부로 돌려 이제까지 잊고 있던 소중한 전통문화의 장점을 되살려 현대인의 미적 감수성에 응답하는 새로운 형식의 회화를 만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 개인의 변신은 결과적으로 한국미술의 한 성과로 이어지리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머지않아 필시 우리 모두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형식미에 도달하리라 믿는 것도 그의 작가적이 역량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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