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천 : 새로운 조형적인 관점을 반영한 현대미학 수용

2011. 09.30(금) 12:57

최근 각 장르간의 경계가 붕괴되면서 표현양식은 물론 기법이나 심지어는 재료까지 공유하는 시대가 되었다. 다시 말해 한국화와 양화의 구분이 모호한 지경이 됐으며, 사진과 회화의 경계마저 허물어졌다. 이는 현대미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접근방법 및 해석, 그리고 재료 사용에 따른 자유로움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이제는 전통적인 회화 및 조형개념에 충실하는 일 자체가 고루하게 인식되는 상화에 이른 것이다.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에 전념해온 오재천의 경우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현대미학의 영향을 받아들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재료를 기존의 캔버스에서 한지로 대체한 사실이 그렇다. 유채에는 캔버스라는 당연한 공식이 깨진 것은 오래지 않다. 물론 일반 종이재질에 유채를 사용한 예는 오래다. 서구에서는 캔버스를 구하기 쉽지 않아 하드보드라든가 종이 위에 유채를 사용해 그림을 그린 예가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경우처럼 한지에다 유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일은 근래의 일이다.

그렇다면 한지 위에 유채를 사용한 결과 재료상의 문제는 없는 것일까. 한지는 닥이라는 재료를 사용해 만들기 때문에 그 조직이 질기고 유연하며 흡수성도 뛰어나다. 따라서 오히려 캔버스보다 보존성에서도 뛰어나다. 한지는 천년이 지나도 조직이 변하지 않고 거뜬할 만큼 내구성이 좋다. 그러나 유채와의 결합에서 한지는 캔버스가 가지고 있지 못한 장점, 즉 흡수성이 좋아 번뜩이는 기름 성분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실제로 캔버스를 사용한 최근 그의 작품을 보면 눈을 자극하는 유채 특유의 광택이 나지 않아 부드럽고 순연한 인상이다. 캔버스 위에서는 유채의 기름 성분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반면에 한지 위에서는 기름기가 흡수돼 한결 부드럽고도 밀착력이 강하게 보인다.

이처럼 새로운 재료를 사용한 최근의 작업은 확실히 이전보다 부드럽고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 극사실적인 세밀한 묘사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그림에서는 이와 같은 시각적인 효과가 좋다. 기름 성분이 흡수됨으로써 생경한 맛이 순화돼, 적어도 수 십 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듯싶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진다는 것은 그림의 연륜의 깊이를 말하는데, 방금 붓을 놓았는데도 생짜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오래 전부터 계속해온 물속 정경, 즉 물길에 의해 닳고 닳은 둥그스름한 돌들을 그린 작품과 정물화만이 출품된다. 물길에 마모된 돌이 얕은 물속에 잠겨 있는 모양은 그 동그스름한 형태로 인해 부드럽고 따스하게 다가온다. 비가 내려 큰물에 떠밀려 내려오는 동안 이리저리 부딪쳐 모서리가 닳고 닳아 둥그스름한 형태로 변한 돌의 모양에서 온갖 세파에 시달리며 꿋꿋하게 살아온 서민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그저 이름 없고 모양도 별달리 눈에 띄지 않지만 왠지 정겹고 따스하다. 그 돌의 형태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캔버스와 마주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개울가가 가 있는 듯싶은 감정에 사로잡힐 지경이다.

돌 하나하나를 묘사하면서 거기에 쏟아 붓는 노력과 정성은 물론이려니와 애정 어린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단순히 실제를 방불케 재현한다는 기술적인 노력에 그치지 않고 마음을 담는다는 작가적인 자세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의 돌을 보는 것과는 달리 숙연한 기분을 물리칠 수 없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하는 작품에서는 물에 비친 희뿌연 하늘이 눈에 띈다. 물에 비친 하늘색이 강조됨으로써 한층 표정이 풍부해지는 시각적인 효과를 얻고 있다. 이렇듯이 하늘색에 따라 물속 정경도 그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이다.

한편 정물화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전의 전형적인 사실주의의 정물화에서 탈피하여 현대적인 미적 감각을 반영한 것이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배경을 추상화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정물화에서는 소재가 놓여 있는 자리, 즉 바닥과 배경이라는 조건이 설정되어 있다. 더불어 그 놓여 있는 자리에는 음영이나 반사 이미지가 표현되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시도하고 있는 일련의 추상화된 배경에서는 이러한 기존의 조형적인 공식에서 과감히 벗어나고 있다. 더불어 소재의 배치 및 배열에서도 이전과 다른 새로운 공간개념을 적용하는 등 혁신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소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극렬하게 묘사하지만 바닥과 배경의 구분 자체를 의식하지 않은 채 완전히 어두운 색채로 통일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두운 추상적인 배경 속에서 달랑 정물이 놓여 있는 형국이다. 이처럼 배경을 단일색조의 추상적인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정물화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시각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현실적인 공간감을 배제한 채 단지 소재 자체만을 부각시킴으로써 감 모과 따위의 과일이 마치 보석처럼 생경하게 보이는 것이다. 소재가 놓여 있는 주변 정황과 연관시키지 않고 단지 소재 그 자체만을 본다는 것은 이 시대감각에 맞는 조형개념이다. 정물로서의 소재가 아니라, 소재 고유의 존재성을 선명히 드러내기에 그렇다. 이는 추상적인 공간의 대입을 통해 발생하는, 새로운 조형적인 관점을 반영한 결과이다.

아무튼 그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그 자신의 작업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현대적인 조형감각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 및 수용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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