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석현(石峴) 박은용(朴銀容)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린 “동양의 고흐”
평생 민족사의 아픔간직한 채 ‘고독한 畵業’쌓았던 농부화가 2017. 01.24(화) 10:55 |   | 요즘 화랑가의 불경기가 심각하다. 그림 가격이 크게 내린 것은 물론이려니와 몇 몇 인기 작가군을 제외하고는 아예 거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화랑가의 설명이다. 몇몇 인기작가들도 가격대는 2,3년 전에 비해 크게 낮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림이 없어 팔지 못하거나 그림가격이 꾸준히 오르고 있는 작가가 있어 관심을 모은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수채화가 고 배동신 (裵東信.1920~2008) 선생과 한국화가 석현(石峴) 박은용(朴銀容.1944~2008) 선생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가는 2008년 나란히 우리 곁을 떠났다.
배동신 선생 사후 3,4년이 지난 뒤 해외 경매사이트에서 잇따라 최고가에 낙찰되면서 컬렉터들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지난 2014년 10월 대표작 중 하나인 「누드수채화」가 이베이의 온라인 경매를 통해 36만 달러(약 4억 원)에 판매된 데 이어 지난해 7월에도 정물화 「복숭아」가 글로벌 마켓플레이스 ‘이베이’를 통해 18만 달러(약 2억 원)에 판매되었다.
「누드수채화」는 일본 오사카에 머물고 있는 배화백의 가족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전 비슷한 구도의 누드작품을 몇 점 더 남긴 것으로 알려져 컬렉터들을 중심으로 소재 파악 열기가 뜨겁다. 특히 한국의 화가 작품이 해외 경매사이트에서 거액에 낙찰된 경우가 거의 없어 배화백의 작품에 고가 행진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자못 기대가 크다.
문화通은 지난해 배동신 화백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집중 보도해 애호가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광주는 물론 서울의 화랑가와 컬렉터, 미술평론가들의 책 구입 요청으로 보관본까지 배부하기도 했다.
석현 박은용의 그림은 현재 예술의 거리에서 전지(全紙 ,40호 크기) 한 장에 200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동시대의 한국화가나 대선배들의 그림이 거의 거래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유달리 그의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광주에서 오랫동안 화랑을 운영해온 원화랑 박희재 대표는 “석현 선생의 그림값이 많이 오른 편이고 찾는 컬렉터들의 의외로 많으나 시중에 나와 있는 그림이 많지 않다.”고 말한다. 무등고미술원 고송석 대표도 “지난해 가을부터 석현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면서 “생전에 화려하게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예술가로의 진정한 삶과 개인적 비극 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의 그림을 소장하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 귀로(시골장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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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세상에 살면서 남루(?)했다. 항상 허름한 옷을 걸치고 말소리조차 크게 내본 적이 없이 조용조용 살았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었다고 말한다. 이는 민족사적 비극과 무관하지 않다. 7살의 어린 나이에 좌우도 아닌 선량한 아버지와 형이 이념전쟁 사이에서 학살당하는 비극을 목격하고 세상이 두려웠고 외상스트레스 중후군인 성격장애까지 겪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배회하기보다는 작업실에 앉아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이다.
“김홍도·신윤복 이후의 ‘현대적 감각의 풍속화가’”
그의 서울전이 열렸을 때 운보 김기창 화백은 그림을 보고 “비로소 진짜 우리의 한국화를 본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또 어떤 평론가는 “18세기 후기 김홍도와 신윤복 이후 현대적 감각의 풍속화를 제대로 계승한 작가”라는 평을 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어떤 이는 네덜란드 출신의 비운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에 비교하기도 한다. 네덜란드 시절 어두운 색채로 비참한 주제가 특징적이었고, 아를르에서 병의 발작에 의해서 자기의 왼쪽 귀를 자르고 결국 권총으로 자살했던 고흐의 삶과 닮았다는 것이다.  | 바다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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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도 고흐처럼 고독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흔살 무렵 화순군 남면 사수3리 두강마을로 들어가 자신의 손으로
화실을 짓고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갔다기 보다는 영혼의 쉼을 위해 고향마을 같은 두강으로 들어간 것이다. 흙 묻은 장화에 밀짚모자를 쓰고 낫을 들고 풀을 베는 농부화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평소에도 “아이들이 졸업하면 완전히 귀농하여 체험학습장을 완공해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전통문화와 가치를 가르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자녀들이 졸업하기도 전에 두강화실에 들어가 깊은 고독과 사투했다.
여기서 잠시 박은용의 생애를 더듬어 보자. 그는 진도군 고군면 석현리에서 상업을 하던 박영과 최귀덕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7살 때 6.25 한국전쟁으로 아버지와 형 등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일생동안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다.
조대부중을 거쳐 조대부고를 미술부 장학생으로 졸업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2년 전국학생미술실기대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해서도 재학시절 서라벌예대의 호프였다. 이후 고향 진도에서 몇 년간 미술교사로 활동하다가 광주로 이거해 왕성한 창작활동을 폈다. 1981년 부산의 고관당화랑 초대전과 1983년 서울 동덕미술관의 개인전을 가지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의 백자와 화강암의 석질 표면을 연상하게 하는 적묵법(積墨法)과 세련된 구도감각으로 독창적 작품세계로 화단의 이목을 모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코 녹록치 않은 도시생활과 순탄하지 않은 가정생활 등으로 수차례 정신병원 수감 치료를 받기도 했고 억울하게도 사상문제까지 비화되면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림만큼은 매우 건강했다. 전통 재료와 기법을 바탕으로 남도의 평범한 산하와 농촌 현실을 반영한 민중들의 삶을 독특한 필치로 그려내 확고한 자기 세계를 인정받았다. 이후 전남 화순군 남면 사수3리 689번지, 두강(頭江)마을에서 20여 년 동안 화실을 짓고 살면서 사평의 농촌풍경을 즐겨 그렸다. 특히 “사평 장날풍경”작품 시리즈들은 인정 넘치는 서민들의 삶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60세 이후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의 문제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 추모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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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활동 초기부터 그의 그림들이 주목을 받은 것은 당시 대부분의 한국화가들이 사승 관계로 그림을 배웠지만 그는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미술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관념적 산수화 대신 철저히 실경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그의 그림에는 어김없이 사람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 시대의 풍속화로 평가되기도 한다.
두터운 윤곽선으로 형상을 만들고 등장인물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때로는 일하는 사람의 모습을, 더러는 고단한 일상을 마치고 돌아와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도 담아냈다. 그러나 벌거벗은 여인의 몸이 전혀 육감적이거나 천하지 않다.
오뉴월 뙤약볕에 일하고 돌아와 등물하고 앉아있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는 열심히 직접 씨앗을 뿌리고 염소나 가축을 기르는 농부로 살면서 순간순간의 모습들을 스케치했다. 이런 풍속화의 화면은 근경과 원경으로 나눠져 있지만 원근법을 무시한 작법으로 인해 회화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전통산수의 조형 형식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형상과 선으로 일궈낸 투박한 조형언어가 박은용의 화법인 것이다.
박은용은 그 자신 도회지의 이미지와 맞지 않아 일찍이 콘크리트를 등지고 시골로 돌아갔지만 그 내면에는 이웃의 모습을 목가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깊은 연민을 지닌 작가였다. 그림에 등장하는 당산나무와 고인돌, 시골장, 콩 줍는 아낙들의 모습에는 고졸한 아름다움과 순박함이 담겨있지만 그 울타리를 벗지 못하는 사람들의 한없는 슬픔 같은 것도 함께 배어 있다. 해학적으로 느껴질 만큼 굵고 힘 있는 윤곽선은 어쩌면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의 손짓일 수도 있다.
탑묵법의 시기, 두강화실,
말년의 고독기 등으로 나눠
그의 화업은 크게 3기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일정기간 교단에 근무하면서 안정기를 맞아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던 1980년대 초·중반이다. 특히 1983년 서울 동덕미술관과 광주아카데미 화랑에서 가진 ‘박은용 작품 20년전’은 큰 화제가 됐다 첫 번째 개인전 이후 광주로 돌아와 1년 동안 20시간씩 작업한 결과를 보여주었던 작품전에서 ‘점묵법’으로 주목을 끌었다. 연한 먹에서 진한 먹까지의 10단계에 이르기까지 한 단계씩 건조한 다음 붓 자국을 탑처럼 쌓아올렸다 해서 ‘탑묵법’이라고도 했던 독특한 기법이다. 붓끝을 쑥쑥 문질러 대는 것이 아니라 한 점 한 점 탑을 쌓아올린 그의 화폭은 땀방울로 일군 가을 들판만큼이나 큰 감동을 주었다. 그의 그림은 실경산수를 바탕으로 남도의 들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지만 기존의 남도풍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시 화단의 평가는 ‘신선한 충격’ ‘샛별같은 천재성’이란 것이었다.
두 번째는 화순 두강마을에 손수 토담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평온하게 그림을 그리던 시기다. 우리나라의 평범한 산하와 외딴 농가, 당산나무와 고인돌 등을 한국화의 전통재료와 기법으로 일기처럼 그림을 그렸다. 동네 고샅의 풍경에서부터 타작하는 농부들, 우시장의 풍경, 감을 수확하는 고즈넉한 농가의 이야기까지 소박하고 꾸밈없는 이야기를 화폭에 담았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고 농부들과 어울려 막걸리 사발도 들이키면서 그런 정겨운 삶을 동경하며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의 그림은 훗날 자신의 대표작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으며 더욱 강한 필선과 농묵으로 살아 있는 화면을 보여주었다.
세 번째는 고독기로 1990년대 후반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다. 농익은 화면구성과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 그가 살고 있는 농촌의 풍경을 독특한 조형언어로 구사했는데 이 시기의 그림값이 가장 비싸다. 이 시기의 그림은 실경산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남도 정서를 가득 담은 풍경에서는 그의 수묵이 한껏 빛을 발한다. 1990년대 그의 작품은 두터운 필선, 고졸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감동을 전해준다.
1996년부터 후원인들의 모임인 두강회가 결성되어 1999년 서울과 광주에서 개인전 이후 그의 가족사적 비극 등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그에게 연민을 보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18세기 후반 김홍도와 신윤복 이후 현대적 감각을 살려서 화폭에 흙내음을 발현한 작가라는 평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2006년 광주시립미술관 분관 수묵화 3인초대전 ‘물처럼 바람처럼’전에서 혼신의 흔적을 남기고 소진된 육신의 힘을 견디지 못해 자연의 품으로 갔다. 1999년 개인전 전시평문을 쓴 그의 친구 소설가 백시종은 “소박하고 어린아이 같은 맑은 사고를 했던 화가, 자존심이 강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정직한 작가정신을 가진 농사꾼 화가였다”고 썼다.
실제로 그는 작가노트(2007년 2월 28일)에 “나는 먼 옛날부터 자연을 지키며 자연에 순응하며 이 땅을 지켜온 선량한 민초들을 사랑한다.”고 쓴 것이 있다.
기념사업회 발족…추모비 세운데 이어 기념전 준비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5년 뒤 그를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기념사업회의 전면에는 평소 그를 존경하던 후배들이 있었다. 박종석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최남길(동신대 교수), 박영출, 임정걸 등과 2013년 발기인 총회를 거처 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그리고 1차 사업으로 2014년 5월 11일 박은용이 목숨처럼 아꼈던 두강화실에 박은용 추모비를 세웠다.
기념사업회측은 앞으로 박은용 일대기를 출간하고 3차 청년기 수채화 및 스케치 작품 화집발간, 4차 수묵화 전반 작품집 발간을 계획하고 있다. 이후 5차 광주시립미술관 기획초대전, 6차 사수리 화실 기념관 전환, 7차 박은용 삶과 예술을 주제로 한 학술연구 논문 발표, 박은용을 기리는 청년작가상(한국화) 후원사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현재 매월 1만원 자동이체 계좌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일을 모두 해내기 위해서는 커다란 난관이 예상되지만 “석현을 그대로 잊혀진 화가로 보내 버릴 수 없다.”는 것이 기념사업회 이사진과 후원회원들의 생각이다.
박은용 선생과 말년을 같이 있던 후배 화가는 말한다 “소경이 많은 나라에서 진짜 두 눈을 가진 화가였다:”면서 “전통문화와 서민의 삶을 대변한 한국적 본질을 담아낸 화가”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런 이야기도 전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이 후원회 후배들에게 “어이 자네들과 이제 연연을 끊세.”라고 했다는 것. 당시 그는 수술한 뒤 기력이 급격이 약해져 그림도 그리지 못했는데 자정이 넘도록 귀가하지 않아 수소문해보니 사수리 화실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해 버렸다. 박종석 작가는 “병원에 입원이라도 시켰더라면 얼마간 더 살면서 좋은 그림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인데 천추에 한이 된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우리나라 한반도는 천애의 땅이다. 지리적 여건 때문에 많은 전란을 겪어 왔고 현재도 열강들의 간섭 속에서 민천지심으로 이 땅을 지키며 삶의 터전을 만들며 고유한 한국문화를 가꾸어 오고 있다. 오늘날 세계화 속에 발맞춰 국적 있는 한국화로서의 정립을 목표로 후학과 미래의 선구적 방향으로 제시할 때, 우리의 미술은 지역사회와 국가의 주인이 될 젊은 세대와 어린 새싹에게 친숙한 생활공간 속에서 정신적 지주로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평범한 산하와 들을 지키며 일구는 농부와 어부, 외딴 농가와 전답, 그리고 당산나무와 고인돌, 근로하며 생활하는 仁兄들을 사랑하기에 즐겨 그리고 현장 생활체험을 통해 작업하고 있다. 또한 우리 국민의 먹거리를 만들어 유통하는 민초들의 현장에 생활하며 한국화의 전통재료와 기법을 바탕으로 현재의 일반 국민의 감성에 맞게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 석현 박은용 2006년 ‘물처럼 바람처럼’도록 발췌
<지형원 발행인>
쭦주요약력
쪾1944년 진도 출생
쪾1963년부터 대한민국미술대전 출품
쪾1966년 서라벌예술대학 미술과 졸업
쪾1976년 한국미술대상전
쪾1978년 중앙미술대상전
쪾1980년 제 1회 개인전 (광주) / 한국현대미술 20인전, 제주전시공관
대전 신신화랑 초대전
쪾1980년 한국문화예술원장상 수상
쪾1981년 영,호남 교류전
쪾1981년 부산 고관당 화랑 초대전
쪾1982년 정예작가 초대전 (서울신문사)
쪾1983년 박은용 작품 20년전 (서울 동덕미술관, 광주 아카데미화랑)
쪾1986년 사경산수 한국화 15인 초대전 (서울 그림마당 민)
쪾1988년 건국50주년기념 한국화전
쪾1992년 정예작가 초대전(서울신문사)
쪾1995년 의재 미술상, 오지호 미술상 기념전 출품
쪾1997년 호남미술 100인전 (조흥은행 창립 100주년 기념전)
제2회 비엔날레기념 광주전남 출신작가전 (궁동갤러리)
광주비엔날레기념 남화전
쪾1998년 대한민국 건국50주년 기념한국화 126인 부채그림전 (서울 공평아트)
대구, 광주 수묵대전 (대구 문예회관 전시장)
한국 부채그림전 (분당 삼성플라자갤러리)
예향작가 10인 초대전 (서울 동덕아트 갤러리)
쪾1999년 제 8회 개인전 (서울 동덕아트갤러리, 광주 신세계갤러리)
쪾2001년 개인전(광주 라인갤러리)
쪾2005년 광주현대미술 조용한 빛 밝은 기운전(광저우 예술박물원)
쪾2008년 별세.
쪾2013년 석현 박은용 기념사업회발족
쪾2014년 석현 박은용 추모비 건립
지형원 mhto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