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칼럼> 珍島의 細方落照

2017. 01.15(일) 21:30

세상 살면서 원(怨)과 한(恨)이 쌓인다. 성공보다는 좌절이, 합격보다는 낙방이, 믿음보다는 배반이 원한을 쌓는다. 유전(有錢)과 무전(無錢)의 분별에 의한 원한도 세월이 갈수록 쌓여 간다. 비행기 마일리지는 쌓일수록 유용하지만 시루떡처럼 쌓인 인생의 업(業·Karma)은 풀기가 어렵다.

나에게 효과가 있었던 방법은 해와 달을 보는 것이었다. 석양(夕陽)과 월출(月出)을 보면 원한이 조금 사라진다. 석양과 월출은 절대적 풍광이다. 수백만 년 전부터 인간이 보아온 풍경 가운데 가장 장엄한 풍경이 저녁 해가 지는 모습과 밤에 둥그런 달이 떠오르는 모습이 아닐까. 인간의 모든 업보는 상대적인 것이다. 원래 있던 것이 아니고 살다가 중간에 생긴 것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인 원한은 절대적인 풍광 앞에 서면 왜소해진다. 짝퉁은 오리지널 앞에 서면 빛을 잃기 마련이다.

전남 진도군 지산면 세방마을 앞바다가 노랗게 물든 노을과 함께 해가 기울고 있다. 세방낙조는 한반도 최서남단의 가장 전망 좋은 곳으로 문화관광부로부터 선정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낙조와 월출을 보러 전국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진도(珍島)에 가면 낙조가 유명하다. 이름하여 '세방낙조'이다. 원한병(怨恨病) 치료에 효과가 있다. 동석산(銅石山)에서 내려온 바위 언덕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수십 개 섬이 포진해 있다. 불도, 혈도, 주지도(손가락섬), 양덕도(발가락섬), 광대도(사자섬) 등등의 섬들이 올망졸망 바다에 떠 있다.
섬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형상이 엄지손가락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손가락 섬이다. 그냥 뻥 뚫린 바다보다도 이렇게 앞에 섬이 많이 있어야만 낙조 감상하는 맛이 난다. 관객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대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들이다. 석양의 색깔도 시시각각 변한다. 누런색이었다가 주황색으로 그러다가 수평선 너머로 해가 넘어갈 때는 진한 주홍색이 된다. 이 주홍색 바다 앞에 서면 인간사 모든 게 부질없다.

바다는 석양의 색깔을 받아들이는 화면과 같다. 이 대자연의 장엄한 화면 색깔이 인간을 매료시킨다. 호수같이 조용하고 잔잔하다. 썰물 때가 되면 물살이 바다 밑 암초를 피해가며 강물처럼 흘러간다. 진도의 '세방낙조'는 분노를 삭여주고 실패를 보듬어주는 절대적 풍광이 아닌가 싶다. 낙조는 신의 자비다..
<칼럼니스트. 동양학>

조용헌 mhto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