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칼럼> “--바람이 부는데 --” ‘바람길’ 걸으며

2016. 10.31(월) 11:17

“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 바람이 부는데 /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 단 한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불어 / 윤동주>”

시를 암송하는 데는 길 걷기가 최고이다. ‘황룡강바람길’을 걸으며 시를 소리 내어 외운다. 길을 걸으며 시를 외우면 걷는 즐거움도 배가 된다. 목청을 높여도 눈치 볼 사람이 없다. 소리는 물결치는 갈대, 하얗게 반짝이는 억새 숲속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 바람이 자꾸 부는데 / 내발이 반석위에 섰다. //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 내발이 언덕위에 섰다.”

걸으며 시 암송에 가을정취까지, ‘황룡강바람길’만한 좋은 길이 있을까. 송산유원지에서 시작해 황룡강 물길 따라 가는 둑길, 갈대, 억새, 왕 버드나무 숲, 길 한 켠 까지 기어 나온 칡넝쿨 속에는 푸른 나팔꽃, 붉은 꽃무릇도 보인다. 둑 아래 망월평야는 황금담요로 덮여있고, 오른편 강변엔 백로가 물위로 날아오른다.

“---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나의 길을 숨기고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았습니까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거울/이성복>” 생각나는 시는 무엇이든 다 읊어본다. 구절전체가 생각나지 않으면 생각나는 토막만 되풀이한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이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천상병>”

내 마음대로 문구도 바꿔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풀꽃/나태주>” ‘자세히 보지 않아도 예쁘다. 오래 보지 않아도 사랑스럽다. 당신이 그렇다’. 재미있다. 제목도 <풀꽃당신>이라고 해볼까. 편곡(編曲)아닌 편시(編詩)이다.

그런데 이성복시인이 말하는 ‘당신’은 누구일까. ‘당신’을 천상병시인이 말하는 ‘세상’으로 바꿔본다. “하루 종일 나는 ‘세상’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죽음 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 ----”

40여분 걸었을까, 수탉우는 소리가 들린다. 표지판에 ‘입석마을 앞’이라 씌어있다, 바람길은 갑자기 코스모스길로 변한다. 길 한편이 온통 바람에 출렁이는 코스모스 밭으로 죽 이어져있다. 쉼표 마침표 하나 없이 잇대어 이어지는 <거울> 시 구절처럼 코스모스길도 끝없이 가물가물하다. 오른쪽 강변 쪽은 나무백일홍이 가로수처럼 줄지어 코스모스와 짝을 이룬다. 2km나 이어지던 코스모스길은 임곡다리 앞에서 끝났다.

“땅끝에 / 왔습니다 / 살아온 날들도 / 함께 왔습니다 // 저녁 / 파도소리에 / 동백꽃 / 집니다 <땅끝 / 고은>”. ‘바람길 끝에 왔습니다. 살아온 세월도 함께 왔습니다. 황룡강바람 소리에 코스모스 집니다.’ 내식대로 읊어본다. 발길을 돌려 왔던 길로 다시 들어선다. 길은 보는 방향만 좌우로 바뀐 바람길 그대로인데 걷는 기분은 새롭다. 맞다! 정말 바뀐 것이 있다.

갈 때는 강물을 가슴에 받으며 산을 향한 길이었다. 지금은 물 흐름 타고 세상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쉬엄쉬엄 두 시간여, 다시 바람길 시작점, 바람길 왕복이 끝났다. ”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 바람이 부는데 /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 ”

이제부터는 세상길이다. 세상길엔 바람, 강물대신 사람, 자동차가 흐른다. 자동차소리가 파도소리처럼 들린다.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김종남<언론인>

김종남 언론인 mhto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