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칼럼>‘남을 아프게 할 만큼’글을 써본 적 있나

2016. 04.29(금) 10:17

한 달에 한번, 책 읽기 모임이 있다. 정해진 책을 읽고 토론을 벌인다. 주제발표는 회원들이 돌아가며 한다. 이번 달은 내 차례이다. 이성복 시인이 최근에 펴낸 <극지의 시>를 같이 읽기로 했다. 책은 시집이 아닌데 시집처럼 크기도 작고 얇다. 시 쓰기와 글쓰기에 대한 얘기들이다. 쉽게 읽히지만 오랜 시간동안 생각해야할 글귀들이 많다.

“평생 서울 간다면서 부산 가놓고, 남대문이 왜 안 보이느냐고 떼를 쓰면 뭐라 하겠어요. 글쓰기에서 ‘서울 가는 것’은 자기 고통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거예요. 글을 쓰려면 내가 먼저 아파야 해요. 그래야 남을 아프게 할 수 있지요. 나도 안 아프면서 어떻게 남을 아프게 할 수 있겠어요.”

기자로 30년 세월 지내고 지금도 글을 쓰고 있으면서, 나는 얼마나 ‘자기 고통을 응시하며 남을 아프게 할’ 만큼 글을 써본 적이 있었던가. 맨날 ‘서울 간다’면서 광주언저리만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가슴이 찔린다. 그런데, 이성복시인은 무엇을 ‘자기 고통’이라 했을까. 보통 글쟁이들이 어떻게 ‘뚫어지게 응시할만한’ 자기고통을 찾아낼 수 있을지.

이성복이 20여 년 전 쓴 ‘액자 속의 사내를 찾아서 –그의 삶, 그의 글쓰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시인은 이 산문에서 ‘그’라는 3인칭을 내세워 남의 이야기처럼 자신의 글쓰기 삶을 풀어냈다. “타인의 슬픔을 슬퍼하는 그의 슬픔은 타인의 슬픔이상으로 클 때가 많다. 때로는 타인이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전혀 슬퍼하지 않는데도, 그가 타인의 슬픔을 대신 앓는 경우까지 있다.” 그는 자신의 비정상적인 비사교성, 비사회성에 대해서도 스스로 각주를 붙여 설명했다. “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을 지닌 그에 대한 어머니의 과보호에 의해 조장된 것일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의 시 쓰기는 ‘자기고통으로 남 위로하기’이자 ‘거꾸로 살기의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니까 시인 이성복의 ‘자기 고통’은 ‘타인의 슬픔을 대신 앓는 고통’이었다.

20년 전, 나는 시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기껏 중고교시절 배웠던 소월이나 영랑, 이육사의 시 정도만 알았었다. ‘너무 어렵다, 너무 추상적이다.’는 것이 시를 멀리하는 변명이었다. 그 때 기사쓰기로 하루하루 먹고살던 기자가 생각하는 ‘시라는 것’은 ‘다이아몬드처럼 글을 갈고 다듬는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 그러나 현실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치품’ 정도였다.

멀리만 있던 시가 가슴에 닿은 것은 우연히 이성복의 시를 읽고 나서부터다. “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 포석을 치고 /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 / 온몸을 적십니다 (비1) ”. 뜬구름 같던 시어들이 손에 닿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습니까 (이별 1)” ‘제 구조로써 자신의 하중을 지탱하는 홍예문’처럼 손가락 하나 끼어들 틈도 없이 맞물려 이어진 구절구절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말과 말, 문장과 문장사이의 고유한 맞물림을 찾아내는 거예요. 홍예문처럼 지주를 받쳐주지 않아도 돌과 돌 사이의 맞물림에 의해 스스로 내걸리는 다리처럼, …(극지의 시 94쪽)” 토론은 재미있었다. 다들 책읽기를 좋아하는 만큼 글쓰기의 어려움도 잘 알았다. 모임 후 저녁 먹는 시간에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글쓰기의 진수를 조금 맛본 하루였다.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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