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시애틀, 광주의 잠 못 이루는 밤’

2013. 09.12(목) 16:41

미국 북서부 최대도시 시애틀은 상업과 공업의 중심지다. 대륙횡단 철도와 자동차 전용도로의 기점이자 국제공항이 있고 복합문화공간 시애틀센터, 높이 185m의 우주전망대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이 유명하다. 미국인들에게는 비와 커피,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에게 시애틀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이란 영화로 친근해졌다. 이 영화는 전혀 알지 못하던 남녀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사랑을 이루는 로맨틱 코미디다.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시름에 잠겨 있는 주인공 샘(톰 행크스)과 방송에 나와 새엄마가 필요하다는 아들의 하소연을 듣고 찾아온 애니(맥 라이언)의 아슬아슬하고 가슴 저리는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거대한 도시, 아름다운 시애틀. 그곳은 ‘인간들이 잠 못 이루는 곳’이기도 하지만 20세기말 문화사에 큰 획을 그은 문화도시이기도 하다. 이른바 ‘한 도시 한 책 읽기’(One Book, One City) 운동을 시작한 근사한 도시가 바로 시애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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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8년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시 공공도서관에서 시작한 One Book, One City의 프로젝트명은 ‘만약 온 시애틀 시민들이 같은 책을 읽는다면’이었다. 시카고시는 시민들에게 하퍼 리(Harper Lee)의 퓰리처상 수상작인 ‘앵무새 죽이기’를 읽자고 제의했다. 당시 책을 읽은 사람들은 독서 배지를 착용했고, 지하철이나 공원 등에서 만나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독서운동이 지역공동체 문화의 출발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2001년 시카고의 ‘One City One Chicago’로 발전했으며, 영국 브리스톨을 비롯해 캐나다 등 영미권 나라로 급속히 확산됐다. 미국 전역에 퍼져 현재 48개주 239개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 운동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2003년이다. 서산시가 시범사업으로 시행한 데 이어 순천, 부산, 서울, 원주, 대구 등 많은 도시로 확산되었다. ‘한 도시 한 책 읽기’는 토론과 다양한 문화행사를 펼치는 하나의 독서운동이다.

늦었지만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나아가는 광주에서도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전남대학교가 ‘광주가 읽고 톡(talk)하다(이하 광주톡)’ 프로그램을 통해 1년에 한 권씩을 선정, 광주시민에게 함께 책을 읽자고 나선 것이다. 지난 7월 교수와 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한책선정위원회’에서 후보도서 10권을 선정하고 온라인 투표를 통해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온 편지’(박석무 편역)를 올해의 책으로 뽑았다.

이 책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귀양지 강진에서 자식과 아내, 동생에게 쓴 편지다. 힘들고 어려운 유배생활에서도 자식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깨우치고 타이른다. 또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절절이 묻어난다.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이기 전에 ‘인간 정약용’의 모습이 담겨 있다.

1부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슨 공부를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 “죄인의 자식이라 해서 기죽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까지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다. 2부는 두 아들에게 집안사람들이 지켜야 할 가계(가훈) 9편을 통해 친구를 사귈 때 가려야 할 일, 친척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 등을 깨우쳐 주고 있다.

3부는 흑산도에서 귀양 살던 둘째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로 우애를 가지고 학문과 인생을 토론하고 있고 4부는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글이다. 다산이 아들들에게 강조한 것은 바로 효제(孝弟)와 독서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 그리고 책을 읽어 마음을 깊게 하라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책에 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핸드폰 만지기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잠깐 멈춤’을 제안하고 있는 셈이다. 150만 광주시민이 ‘유배지에서 온 편지’로 인하여 단 하룻밤이라도 ‘광주의 잠 못 이루는 밤’이 된다면….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다.

몇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인문학 열풍’이 방향을 잡아가는 듯하다. 실제로 도심 곳곳에 철학자 니체의 사상과 미학을 조명하는 ‘니체쇼’포스터가 붙어 있고 바흐나 헨델의 시리즈 연주회 소식도 들린다. 각종 전시회 제목도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의 깊이가 느껴진다. ‘책을 읽는 광주’가 실현된다면 광주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이기에 충분하다.

지형원< 문화통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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